진주 용화사
1. 새로울 신, 편안할 안, 신안사(新安寺)
조선중기 편찬된 진주시(진양군)의 역사 지리를 담은 <진양지>에 따르면,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신안사' 라는 대가람(현재 진주시 신안동의 동명은 신안사 사찰명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임)이었다.
2. 임진왜란 3대대첩 #진주성대첩 그리고 승병들의 숨은 희생과 신안사 전소 사건
임진왜란 3대대첩(한산도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전투(1차전) 당시, 왜구 3만대군을 3천의 군사로 물리칠 때, 이순신 장군이 이끌던 전라도와 한양으로 밀고 올라가기 위해 먼저 교통ㆍ교역의 요충지였던 진주성을 탈환하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끌던 왜구는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진주는 백성을 버리고 제 가족만 데리고 도망쳐버린 진주목사에 비해, 김시민 장군이 마지막까지 진주목의 백성들과 진주성에 남아 고도의 심리전과 아낙들까지 나서서 돌과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눈물겹게 왜구의 침략을 버텨내었다. 그때 '살생을 하지 말라'는 부처님 제 1계율을 어기고서라도 나라와 뭇 생명을 살리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분들이 있었으니 바로 스님들이다.
당시 말이 쉬어가는 서진주 평거 역사驛舍 근처에 위치한 신안사新安寺 스님들은 승병으로 참전하여 수행으로 닦인 지혜를 발휘하여 장군들에게 승리의 전략들을 제시해주는 중요한 역할들을 맡았다. 신안사는 진주성대첩 당시, 조선 승병과 관군, 의병들의 훈련본부이자 후방에서 지원하는 무기창고로써 쓰이다, 논개의 의로운 죽음으로도 널리 알려진 진주성전투(2차전) 때 왜구에게 패하면서 밀고 들어온 왜구에 의해 모든 스님들이 죽임을 당하고 도량 전체는 불타 전소되고 말았다.
통일신라와 고려불교의 양식으로 조성되어 이 도량을 지켜오던 돌부처님은 좌대와 광배, 기와 전돌들과 함께 그대로 땅 속에 파묻혔고, 수백 년 간 이 땅을 떠나지않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아픈 근현대사를 땅 속에서 지켜보셨다. 사찰의 땅은 백성들이 터 잡고 사니 자기 땅이 되어,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진 폐사지가 되었다.

3. 세상에 다시 나오실 시절인연, 선몽
그러던 1960년대 후반 어느 날, 평거동 지역의 유지였던 할아버지의 꿈에 돌부처가 나타나 "나를 좀 일으켜주시오" 라고 말을 하고, 똑같은 선몽을 세 번을 꾸게 된 할아버지는 이상히 여긴다. 홍수로 땅이 파헤쳐지던 날, 꿈에 본 장소(현재 용화사 삼성각 터)를 찾아가 반쯤 드러나 누워계신 돌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장정들을 불러모아 조심히 파보니 돌부처님이 발굴되신다.
고증해보니 조성된 지 천년인 고불임이 밝혀지고, 파손 등으로 아쉽게도 국보보물은 아닌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 67호 진주평거동석조여래좌상' 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때는 1972년 2월 12일의 일이었다. 당시 처음 발견한 자와 발굴된 토지소유자 사이에 소유권 시비로 부처님은 서울 대법원까지 다녀오시기도 했지만, 모든 시비는 원만히 해결되었다.
4. 묵묵히 가피를 보이시다
처음엔 그저 돌덩어리인 줄 무시했던 동네사람들은 서서히 이 부처님의 힘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진주시에서 현재의 삼성각 건물을 지어 부처님을 모시기 전까진 길 가에 그냥 방치되어 있었는데, 부처님께 장난으로라도 돌을 던지거나, 아들 낳으려는 미신으로 부처님 코를 긁어 가 물을 마시는 등 부처님을 훼한 사람들은 피를 토하거나 횡액을 당하고 서서히 집안이 망하는 현상을 만나고, 절 땅을 파서 밭을 만들고 근처에 집을 지어 살다가 땅에서 나온 전돌이나 기왓장, 그릇을 욕심으로 집으로 숨겨서 가져가면 갑자기 아이가 아프고 집안에 환란이 생겼는데 동네의 무속인이나 지혜있는 이에게 물어보고 가져간 절 땅의 물건을 제자리에 도로 갖다놓으면 거짓말처럼 병이 낫고 재앙이 가라앉았다고 한다.
반대로 부처님 비 맞으실까봐 볏단을 씌워드리는 순수한 정성, 수박과 쌀 농사지은 수확물을 공양하며 절을 올리고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을 보인 사람들은 소원이 척척 이루어지며, 아무리 다른 곳에 가서 공을 들여도 안되던 생남불공이나 시험합격기도가 이 부처님께 정성을 쏟으면 바로 성취되는 체험을 무수히 하게 된다. 돌부처님이 눈 앞만 보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영험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5. 천년, 진주시민을 지켜 준 돌부처님의 꿈
동네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부처님을 미래세에 중생을 구제하러 오신다는 '미륵부처님'으로 여겼고, 이 도량을 '미륵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또한 그간 콜레라(역병)가 돌고 자연재해로 사방이 쓸려나가도 이 부처님이 파묻혀있던 땅 사방 100리 안은 수월하게 넘어갔던 전설같은 이야기가, 다 이 돌부처님의 보호 덕분이라는 걸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라고 증언한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 마을사람들은 그렇게 굳게 믿었고, 부처님을 "이 동네를 지켜주시는 큰 어른"으로 깊이 믿고 의지했다.
6. 인연 따라 나투다, 성주스님
1988년 여름날, 당시 해인사 고운암(海印寺 孤雲庵) 에서 법모(法模) 스님 문하에서 정진 중이던 비구니 성주(性珠) 스님이 걸망을 지고 이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성주스님의 얼굴을 마주 한 이 땅의 소유자 노보살님은 깜짝 놀라며 "스님 어젯밤 제 꿈에 본 그 스님이시네요!" 라고 한다. 사연인 즉슨, 어젯밤 꿈에 긴 수염이 하얀 노인 나타나 성주스님 얼굴을 비춰주며 말하길 "자네 그 어깨에 짐을 그만 내려놓게!" 하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해 동네에 이름 난 쪽집게 보살에게 무슨 꿈이냐 물으니, "문서가 나가겠네! 이제 진짜 주인이 오니 드리시오." 라는 답을 들은 차였던 것이다.
7. 신안사 그리고 미륵당, 용화사로 다시 태어나다
성주스님은 그 날로부터 이 도량에 머물며 칠월칠석법회를 기점으로 정성스러운 기도에 들어가게 되었고, 사찰명을 '용화사(龍華寺) '로 짓고 도량을 돌보기 시작했다. 용화사는 경전에 미륵부처님이 미래세에 오셔서 설법을 베푸신다는 용화세계를 기다리는 백성들의 염원을 그대로 담아낸 이름이다.
8. 도량 불사를 서원하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찾아오는 사람에 비해, 법당이 너무나 협소하여 두 사람이 들어가면 몸이 부딪힐 지경이었다. 법당 밖을 돌아보면 '어르신께 먼저 인사를 드린 후 다른 절에 가야 한다'며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진풍경이었다. 하여, 성주스님은 과거 불타기 전 만큼의 영화는 아닐지라도, 이 부처님에 걸맞는 제대로 갖춰진 대웅전을 지어 모셔야겠구나 발원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30년 세월을 하루같이, 추우나 더우나 새벽 사시 저녁으로 간절히 기도하여 불사를 이루게 되었다.
스님이 원을 세우자 마치 정해져있었던 듯이 시골 논밭에 허허벌판이던 평거동 일대가 진주시 주택개발지구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도로확장공사와 아파트 건설공사가 이루어지고, 자연스럽게 법당과 선방 요사채 불사에 든든한 지원군들이 용화사로 모여들게 된다. 불사과정에서 일어난 무수한 기적과 신비경험들은 필설로 다 할 수가 없다.
9. 기도와 참선명상도량, 진주용화사 화림선원
용화사 선원의 이름은 '화림선원華林禪院'으로, 이 선원에서 정진한 모든 수행자들은 미래 용화세계에 미륵부처님이 여시는 화림원華林園 회상에서 다시 만나 중생을 괴로움에서 건지는 일을 함께 합시다 약속하는 뜻으로써, 한국불교의 큰 스승이신 송담 정은(松潭 正隱 : 인천 용화사 선원장) 큰스님께서 내려주신 편액이다.
10. 운성스님, 붓다꽃씨운동
성주스님은 문하에 일공스님, 운경스님, 준성스님, 운성스님, 보성스님 총 5명의 상좌를 두셨고, 번갈아 소임을 보아오던 중, 2019년 3월부터 운성(運性) 스님이 부주지스님으로 소임을 맡았고, 2021년 1월 20일 운성스님이 주지스님 소임을 임명받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주스님께서는 이후 모든 일을 물려주시고 '회주會主스님' 소임으로 물러나시어 도량의 어른스님으로서 기도수행의 눈빛으로 든든히 불자들의 오고 감을 살펴주고 계신다.
운성스님은 '(사단법인)꽃씨명상터'를 열어, 한 개인의 깨어남이 세상의 평화로 이어지는 텅 빈 충만에 바탕을 둔 '깨어있는 자비(Emptiness with Compassion)' 즉 '사회적 참선'으로 수행자들의 한 마음이 모인 공동체가 혼탁한 시대를 구한다는 평소 소신대로, 은사스님이 이루어놓으신 외적 불사를 이어, 내적 불사에 헌신하고 있다.
이 시대의 눈높이에 맞는 체계적인 불자교육, 몸과 마음의 통합적 치유와 참선명상염불을 통한 본래면목 붓다꽃씨에 깨어나는 수행, 법회와 강연, 방송, 문화포교, 국내외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구호나눔봉사로, 생활수행자인 '시민보살'을 배출하는 학교 <붓다꽃씨 수행아카데미>와 (사)꽃씨명상터에서 <통합명상그룹>등 다양한 명상치유그룹을 열고, 어린이법회, 청년대학생 법회 등 미래세대 인재불사, 소외된 이웃과 함께 호흡하는 자비나눔실천을 지속하고 있다.
진주용화사를 시작으로 온 국토가 빈부, 성별, 국경, 종교, 이념의 이데올로기의 벽을 넘어선 치유수행나눔공동체의 놀이터 즉 광장으로 꽃피길 서원하는 '붓다꽃씨 운동'이 운성스님이 자신 앞에 다가온 주지 소임에 대해 오랜 고뇌 끝에 받아들이며 부처님께 올린 서원誓願의 핵심이다.
진주용화사 평거석조여래좌상 역사 자료
* <진양지> (국역)
http://jinju.grandculture.net/Contents?local=jinju&dataType=01&contents_id=GC00403212
* <진양지> (한국학중앙연구소 소장)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4788
*진주 용화사 평거석조여래좌상 <위키디피아>
https://ko.m.wikipedia.org/wiki/진주_평거동_석조여래좌상
*<평거석조여래좌상> (한국학중앙연구소 소장)
http://jinju.grandculture.net/Contents?local=jinju&dataType=99&contents_id=GC00402414
*<경남일보> 평거석조여래좌상 국보 승격 추진
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0596#09xs
*<진주시청 유형문화재 검색> 진주 평거동 석조여래좌상
http://www.jinju.go.kr/02793/02258/02282.web?amode=view&idx=539&cpage=1&sstring=용화사&stype=address
*방문하신 분들의 리뷰
https://m.blog.naver.com/buddhafind/222024985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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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https://m.youtube.com/@fsmedi24
🌸방송
[운성스님 라디오 :옛날방송 다시듣기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_qZLrJe3GOx6kfvj7n9CVQ
[운성스님 BTN라디오 생방송]
*유투브(보이는라디오)
https://www.youtube.com/channel/UCbhhnQpC9yUl06hu-FJdTVg
*울림 앱(바탕화면 설치 후 고요히 듣기)
[한국불교대표방송 BTN불교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