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용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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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모法模 스님은..
진주용화사 모든 스님들과 불자들의 뿌리이고 고향집 이십니다.
출가에 이르기까지
산청군 생비량면 부유한 세도가인 안동 권씨 집안의 귀한 딸로 태어나, 그 집안 땅을 밟지 않고 지나다니기 어려울 만큼이었다고 합니다. 교육을 받고 장성하여 공직에 근무하며 세상사에 눈을 떴습니다. 나중에 스님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고민들을 상담해 주실 때 진정성 있는 상담이 되었던 까닭이 이 때의 세상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른들이 정해 준 대로 영일 정씨 집안과 혼인을 하였으나, 생남불공을 하러 절(당시 진주의 유일한 비구니 사찰이던 상봉동 비봉산 아래의 도솔암. 현재의 법혜사에 도여스님 사리탑이 봉안되어 있음. 한국 비구니계의 계민문도회에 속함)에 갔다가, 당대 걸출한 비구니 도인으로 일컬어지는 도여道如 스님을 만나 크게 열리는 체험을 하고, 출가를 결심합니다.

출가
귀한 집안에 딸을 낳아 어느 정도 길러 준 후, 첫마음을 잊지않고 도여 스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한 날 한 시에 삭발했지만 연장자이던 덕광德光 스님을 사형이 아닌 은사로 출가하게 됩니다. 지금 같으면 가당치 않다고 반발할 수 있는 결정이지만, 순수한 구도심은 존경하는 스승이신 도여 스님의 어떠한 결정도 다 공부 분상의 뜻이 있으시겠거니 하고받아들여졌다 후학들에게 전하셨습니다.초발심
명절이면 갈비짝이 창고 가득 선물로 들어오는 대가집도 창살 없는 감옥 같이 느껴졌다는 스님은, 워낙 부유한 집안의 재산과 명예를 버리고 출가한 길이라 "말밥을 버리고 되밥을 주우러 갔느냐?"는 비아냥도 출가 후 한참을 들어야 했습니다. 허나, 탁발 나가서 길바닥에 거적대기를 깔고 보리밥을 얻어 먹어도 좋고, 종이가 없어 경전이나 염불문의 말씀들을 법문을 듣고 다 암기하여 외워야 했고, 군불 떼는 부엌 바닥에 부지깽이 막대기를 리듬 타며 두드려 목탁과 요령 연습을 하여도, 추운 겨울날 비단옷 버리고 목화솜 기워 입고 종일 일하다가 찬 바닥에 땀을 흩뿌리며 온 몸 던져 삼천배 오체투지를 밥 먹듯 하여도,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그리도 편안하고 행복한 길이 없으셨다 합니다. 하루하루가 천금같이 여겨져 귀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회고하시곤 하였습니다.수행
도인이 쏟아져 나오던 당대 무수한 선지식들을 직접 만나 참선법을 사사하여 수행하였고, 언양 석남사, 해인사 국일암, 양산 내원사 등 전국 각처 굴지의 비구니스님들의 선원禪院 참선도량에서 안거安居 정진하셨습니다. 1976년 신라 하대 고운 최치원 선생의 마지막 은거 수행터인 해인사 고운암孤雲庵에 암주로 추천받아 부임하셨고, 그로부터 남은 생토록 '고운암 노스님'으로 불리며 오롯이 정진하셨습니다.법모 스님은 평생 손에 호미와 걸레, 경전과 화두참선과 염불수행을 놓지 않고, 노환이 오기 전까지는 평생 끼니와 암자 관리를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다 해결하셨으며, 심심산골 암자에서도 매일 홀로 깨어나 예불과 세상사람들을 위한 기도와 수행을 게을리 않는 꼿꼿한 수행자였습니다. 성철 스님이나 혜암, 법전, 자운, 일타 스님 같은 산중의 큰스님들이 가끔 고운암에서 바라보는 가야산 상왕봉을 감상하러 포행을 오시면, 큰스님이라고 호들갑을 떨지 않고 하던 일을 묵묵히 하며 물 한 그릇 깨끗이 퍼 올릴 뿐이었습니다. 시원하게 물을 들이킨 성철스님은 "이게 중이 사는 기다!" 하시곤 했습니다.
수행자로서는 그토록 대쪽 같았지만 부처님 법을 전하는 전법자로서는 봄눈 녹듯 따스하셨습니다. 가야산국립공원에서 고운암이라 적힌 길 안내표지판을 세워주면 뽑아버리길 반복하시며 당신은 아무리 은거를 하셨지만, 이름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인연 따라 한말씀 듣고자 찾아 온 무수한 납자들과 재가불자들을 위해 언어문자를 초월한 법문으로 때로는 단호하고 매서운 회초리로 상相을 부수어주시고, 때로는 손수 지으신 따스한 밥상 차려주며 속뜰의 온갖 고민들 다 털어놓게 하고 치유하고 이불처럼 덮어 주셨습니다. 살아있는 가르침을 주신 당대 해인사 서쪽기슭을 책임지는 진정한 어른스님 이셨습니다.

운성스님을 키워 내신 마음
1977년 어느 날 한 갓난아기가 해인사에 온 인연을 거두셔서 "전생의 은혜 깊은 수행자가 인연 따라 돌아 오셨다" 하시며, 절대 아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항상 존중하셨으며, "이 자체가 나에게 크나큰 수행이다" 하시며 친부모 보다도 더한 정성을 기울여 장성한 수행자가 되기까지 귀하디 귀하게 가르치고 길러 내셨습니다. 그 아기는 현재 용화사 주지인 운성 스님입니다.진주용화사 불사에 화주가 되다
말년에 큰 상좌인 성주 스님이 숙세의 인연 따라 진주 평거동(현 판문동)에 임진왜란 진주성대첩 때 전소된 옛 신안사 절터와 인연이 되어 복원불사를 서원한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아무 것 가진 것 없던 초기에 매달 고운암에서 걸어 내려와 진주행 시외버스를 타고 그릇과 생필품들을 실어나르고 화주 시주 역할을 자처하시어 오늘날의 용화사가 있기까지 쉼없이 지원하고 살펴주신 어른이셨습니다.제자들
문하에 상좌 성주, 정덕, 상경, 종해, 태수, 자경, 원학을, 손상좌 일공, 운경, 준성, 운성, 보성을, 유발상좌로 박권숙(자비화), 김승자, 이경자, 정숙현을 두셨습니다.원적에 드시다
2012년 음력 2월 9일 새벽, 원적에 드시는 순간까지 염불선念佛禪 수행을 놓지 않는 일행삼매 속에 머무시다 입적하신 후, 가야산 하늘에 때아닌 꽃비가 내리는 등 여러 이적을 보이셨지만, 모든 장례절차는 생전에 유언하신 대로 가장 간소하게 치루어, 평생 입으시던 가사 한 장 덮고 다비하여 사리를 따로이 수습하지 않고 사리탑 역시 세우지 않으며 훌훌 그대로 가야산 기슭으로 날려 보내 드렸습니다.